평론_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
( 글. 전 제주도립미술관장 최정주 / 작성 : 2022년 )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안녕을 갈구해왔다. 안락한 생활, 평온한 관계,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염원은 인류가 생존해온 여정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자 최종 정착지의 전형적인 기저가 되어왔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과 마주한 인간들은 어디가 안전한 마지막 정착지인지 도무지 확신하지 못했다. 만족인가 하면 다시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 탓에, 인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끊임없이 질주하며, 울타리를 찾고 경계를 넓히고 더 많이 소유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를 찾아 막연히 표류하기를 자처해왔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표류의 본능은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두 바퀴의 자전거가 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적 별천지를 향해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는 사이 인간들의 꿈과 상상, 바램이 솜사탕 퍼지듯 무한히 조미되면서, 정착지에 대한 기대는 저 멀리 신기루처럼, 혹은 전설 속 풍문처럼 떠돌며 반복적으로 현실의 비루함을 들춰냈다.
동양에서는 다행히도 기원전 8세기경부터 자연을 본받는 것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삼았던 노장사상(老莊思想) 덕분에 인간의 오만을 통찰하고 무위무욕(無爲無慾)의 관계론을 일찌감치 체득해왔지만, 서양의 경우는 인본주의에 따른 독선과 거침없는 방랑의 역사 속에서 최근까지도 더 나은 세상을 찾는 일에 열의를 보여 왔다. 문학에서만 보아도 그 숱한 예증들이 발견된다. 1516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공상소설을 출판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최대한 구체화하려는 시도를 펼친 바 있다. 여행자 라파엘이 보았다는 이상국 ‘유토피아’ 섬은 법률, 제도, 풍습에 대한 영국의 현실을 조율한 그야말로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전해주었지만, 그 실체는 제목 그대로 세상 속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사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툭하면 모반죄에 걸려 27년이나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아직 이 지상에 존재한 적은 없지만, 철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완벽한 국가”를 찾겠다는 일념을 앞세워 1620년 경, 『태양의 나라(La città del Sole)』를 출간하여, 공평무사한 이상사회의 존재를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 사력을 다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26년에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를 통해 물질적인 풍요를 이상향으로 제시하는가 하면, 아일랜드의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소인국과 거인국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이상 국가를 소개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반성까지 덧붙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문학의 맥을 잇기도 했다.
이처럼 평안한 이상향을 좇았던 인간의 의지는 줄기차게 문명과 역사를 일구며 괄목할만한 창조적 행보를 쌓아나갔고, 그 결과 인간의 삶의 구조와 객관적 환경은 눈부시게 진화되어왔다. 생명을 이루는 조건들이 공학적 연구를 통해 낱낱이 밝혀졌고, 물질의 성질과 현상도 물리학적 접근에 의해 조밀한 법칙들까지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인간은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듯한 문명적 도구들을 차고 넘치게 생산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의 번영을 위한 규칙과 결속을 만들고, 공동체 바깥과의 유연한 사회적 관계망을 다지며 풍요로운 생활 패턴 속에서 그 나름대로 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자문할 지점에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세상을 터덜터덜 유랑하는 그대와 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곳에서 진정 안녕한 것인가?”
○ 당신의 유토피아에 초대합니다. (Here is the invitation for your Utopia)
홍시야가 그리는 풍경은 태초의 유토피아와 닮아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가 8세기에 제시한 서사시, 『변신 이야기(Metamorphōseōn librī)』에서 전하는 인류의 황금시대는 태초의 사회라고 언급한다. 그곳은 어떠한 법도 권력도 처벌도 위협도 없는 안전지대이며, 저마다 올바른 일을 하고 평온한 시간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민족들이 사는 곳이고, 일 년 사계절 내내 자연 속에서 나는 풍요로운 꿀과 열매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설에 가깝지만, 인류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유토피아’가 사실은 스스로 떠나온 출발 지점에 있었음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홍시야가 다루는 세상은 둥글고, 조화롭고, 경계가 없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와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평화로운 친밀감을 유지한다. 그곳은 드넓은 들판이기도 하고, 해저와 하늘과 우주이기도 하고, 그 모든 곳이 자유롭게 부유하는 다차원의 공간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안에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하고, 산과 바다, 집, 길, 해와 달, 수풀과 동물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어느 틈엔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은 저마다의 자율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공을 느릿느릿 떠다닐 때도 있고, 지상 위에 차분히 내려 앉아 안전한 울타리 속의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우주 기지처럼 사방에 퍼져 또 다른 존재들과 마주하며 교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림 속 사물들은 납작하게 눕기도 하고,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고, 빙글빙글 회전도 하고, 어깨춤을 추듯 리듬을 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이곳에서는 갓 태어난 존재와 농축된 세월을 품은 존재가 격의 없이 서로 느긋한 호흡을 나누고, 작은 씨앗과 열매의 순환도 평화롭게 교차된다.
또한 이곳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맑고 청아한 색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찬란한 빛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말하자면 캔버스 속의 모든 생명들과 존재들은 평화롭게 공존하고, 서로에게 순응하며 조화를 이루고, 건강한 생명의 기운을 나누고 있다. 그야말로 이곳은 모두가 안녕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홍시야의 그림 속 세상은 작가가 명상을 통해 만나는 무의식 속의 풍경이다. 작가는 20년 가까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치유와 성찰을 지시하는 음악과 미술로 평온한 그곳 세상의 이야기와 풍정을 표현해왔다. 그녀의 그림이 조용조용 말을 걸어오고, 기도처럼 맑고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와 같은 심상의 고요와 평화의 기원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시야는 평온이 가득한 무의식 속의 세계가 전해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이곳 세상에 옮겨 놓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왔다. 그림 수행은 작가 스스로를 위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 되도록 차분히 그 통로를 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방은 결국 인간이 지향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정착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방랑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횡행한 바이러스의 침탈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덮친 위기와 상실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 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무의식에 몰입한 매순간마다 화두를 풀기 위해 몸소 그곳 세상을 깊이 체험하고 답을 찾는 여정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다툼보다는 평화가, 독단보다는 공론이, 죽음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시되었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삶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풍요롭다는 것을 매일 보고 느껴온 작가는 스스로 이 귀중한 전언을 그림으로 배달하는 전달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모두의 안식을 위한 집을 계속 그렸고, 생명의 소중함을 기리기 위해 자연을 쉼 없이 묘사하면서 점점 지금과 같은 공존의 풍경을 확대해 나갔다.
그렇다면 작가가 보는 그곳 세상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류가 기억하고 남기고자 한 화합과 평화의 순간들이 조각조각 저장되어 있는 의식의 창고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하는 그림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이유는, 어느 세대이고 방랑자로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원초적 생명과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진정한 가치들을 깊이 깨닫고 이를 의식의 창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과정이 수 만년의 층위로 두텁게 겹을 이룬 까닭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림의 화평한 세상 속에서 정작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그 가치를 외면하거나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삶의 대부분을 욕망의 늪 속에서 떠돌며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림 속 평화의 땅에서 유유자적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자연인 것이다.
홍시야가 그림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다차원의 시공간에 서려있는 평화와 공존의 모습을 불러오는 의도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안녕과 희망이 자라나는 유토피아’가 신기루처럼 저 멀리에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 안의 각성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뜻한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홍시야의 그림은 이제라도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서로에게, 또한 자연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위무를 나누도록 다정히 권유하는 듯하다. 이러한 권유에 귀 기울이며 작가의 작품과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림 속 유토피아에 어서 빨리 초대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작은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 wish you are here.)
평론_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
( 글. 전 제주도립미술관장 최정주 / 작성 : 2022년 )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안녕을 갈구해왔다. 안락한 생활, 평온한 관계,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염원은 인류가 생존해온 여정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자 최종 정착지의 전형적인 기저가 되어왔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과 마주한 인간들은 어디가 안전한 마지막 정착지인지 도무지 확신하지 못했다. 만족인가 하면 다시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 탓에, 인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끊임없이 질주하며, 울타리를 찾고 경계를 넓히고 더 많이 소유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를 찾아 막연히 표류하기를 자처해왔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표류의 본능은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두 바퀴의 자전거가 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적 별천지를 향해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는 사이 인간들의 꿈과 상상, 바램이 솜사탕 퍼지듯 무한히 조미되면서, 정착지에 대한 기대는 저 멀리 신기루처럼, 혹은 전설 속 풍문처럼 떠돌며 반복적으로 현실의 비루함을 들춰냈다.
동양에서는 다행히도 기원전 8세기경부터 자연을 본받는 것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삼았던 노장사상(老莊思想) 덕분에 인간의 오만을 통찰하고 무위무욕(無爲無慾)의 관계론을 일찌감치 체득해왔지만, 서양의 경우는 인본주의에 따른 독선과 거침없는 방랑의 역사 속에서 최근까지도 더 나은 세상을 찾는 일에 열의를 보여 왔다. 문학에서만 보아도 그 숱한 예증들이 발견된다. 1516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공상소설을 출판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최대한 구체화하려는 시도를 펼친 바 있다. 여행자 라파엘이 보았다는 이상국 ‘유토피아’ 섬은 법률, 제도, 풍습에 대한 영국의 현실을 조율한 그야말로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전해주었지만, 그 실체는 제목 그대로 세상 속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사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툭하면 모반죄에 걸려 27년이나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아직 이 지상에 존재한 적은 없지만, 철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완벽한 국가”를 찾겠다는 일념을 앞세워 1620년 경, 『태양의 나라(La città del Sole)』를 출간하여, 공평무사한 이상사회의 존재를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 사력을 다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26년에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를 통해 물질적인 풍요를 이상향으로 제시하는가 하면, 아일랜드의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소인국과 거인국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이상 국가를 소개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반성까지 덧붙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문학의 맥을 잇기도 했다.
이처럼 평안한 이상향을 좇았던 인간의 의지는 줄기차게 문명과 역사를 일구며 괄목할만한 창조적 행보를 쌓아나갔고, 그 결과 인간의 삶의 구조와 객관적 환경은 눈부시게 진화되어왔다. 생명을 이루는 조건들이 공학적 연구를 통해 낱낱이 밝혀졌고, 물질의 성질과 현상도 물리학적 접근에 의해 조밀한 법칙들까지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인간은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듯한 문명적 도구들을 차고 넘치게 생산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의 번영을 위한 규칙과 결속을 만들고, 공동체 바깥과의 유연한 사회적 관계망을 다지며 풍요로운 생활 패턴 속에서 그 나름대로 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자문할 지점에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세상을 터덜터덜 유랑하는 그대와 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곳에서 진정 안녕한 것인가?”
○ 당신의 유토피아에 초대합니다. (Here is the invitation for your Utopia)
홍시야가 그리는 풍경은 태초의 유토피아와 닮아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가 8세기에 제시한 서사시, 『변신 이야기(Metamorphōseōn librī)』에서 전하는 인류의 황금시대는 태초의 사회라고 언급한다. 그곳은 어떠한 법도 권력도 처벌도 위협도 없는 안전지대이며, 저마다 올바른 일을 하고 평온한 시간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민족들이 사는 곳이고, 일 년 사계절 내내 자연 속에서 나는 풍요로운 꿀과 열매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설에 가깝지만, 인류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유토피아’가 사실은 스스로 떠나온 출발 지점에 있었음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홍시야가 다루는 세상은 둥글고, 조화롭고, 경계가 없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와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평화로운 친밀감을 유지한다. 그곳은 드넓은 들판이기도 하고, 해저와 하늘과 우주이기도 하고, 그 모든 곳이 자유롭게 부유하는 다차원의 공간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안에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하고, 산과 바다, 집, 길, 해와 달, 수풀과 동물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어느 틈엔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은 저마다의 자율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공을 느릿느릿 떠다닐 때도 있고, 지상 위에 차분히 내려 앉아 안전한 울타리 속의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우주 기지처럼 사방에 퍼져 또 다른 존재들과 마주하며 교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림 속 사물들은 납작하게 눕기도 하고,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고, 빙글빙글 회전도 하고, 어깨춤을 추듯 리듬을 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이곳에서는 갓 태어난 존재와 농축된 세월을 품은 존재가 격의 없이 서로 느긋한 호흡을 나누고, 작은 씨앗과 열매의 순환도 평화롭게 교차된다.
또한 이곳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맑고 청아한 색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찬란한 빛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말하자면 캔버스 속의 모든 생명들과 존재들은 평화롭게 공존하고, 서로에게 순응하며 조화를 이루고, 건강한 생명의 기운을 나누고 있다. 그야말로 이곳은 모두가 안녕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홍시야의 그림 속 세상은 작가가 명상을 통해 만나는 무의식 속의 풍경이다. 작가는 20년 가까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치유와 성찰을 지시하는 음악과 미술로 평온한 그곳 세상의 이야기와 풍정을 표현해왔다. 그녀의 그림이 조용조용 말을 걸어오고, 기도처럼 맑고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와 같은 심상의 고요와 평화의 기원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시야는 평온이 가득한 무의식 속의 세계가 전해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이곳 세상에 옮겨 놓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왔다. 그림 수행은 작가 스스로를 위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 되도록 차분히 그 통로를 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방은 결국 인간이 지향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정착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방랑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횡행한 바이러스의 침탈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덮친 위기와 상실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 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무의식에 몰입한 매순간마다 화두를 풀기 위해 몸소 그곳 세상을 깊이 체험하고 답을 찾는 여정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다툼보다는 평화가, 독단보다는 공론이, 죽음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시되었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삶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풍요롭다는 것을 매일 보고 느껴온 작가는 스스로 이 귀중한 전언을 그림으로 배달하는 전달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모두의 안식을 위한 집을 계속 그렸고, 생명의 소중함을 기리기 위해 자연을 쉼 없이 묘사하면서 점점 지금과 같은 공존의 풍경을 확대해 나갔다.
그렇다면 작가가 보는 그곳 세상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류가 기억하고 남기고자 한 화합과 평화의 순간들이 조각조각 저장되어 있는 의식의 창고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하는 그림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이유는, 어느 세대이고 방랑자로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원초적 생명과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진정한 가치들을 깊이 깨닫고 이를 의식의 창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과정이 수 만년의 층위로 두텁게 겹을 이룬 까닭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림의 화평한 세상 속에서 정작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그 가치를 외면하거나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삶의 대부분을 욕망의 늪 속에서 떠돌며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림 속 평화의 땅에서 유유자적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자연인 것이다.
홍시야가 그림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다차원의 시공간에 서려있는 평화와 공존의 모습을 불러오는 의도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안녕과 희망이 자라나는 유토피아’가 신기루처럼 저 멀리에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 안의 각성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뜻한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홍시야의 그림은 이제라도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서로에게, 또한 자연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위무를 나누도록 다정히 권유하는 듯하다. 이러한 권유에 귀 기울이며 작가의 작품과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림 속 유토피아에 어서 빨리 초대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작은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 wish you ar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