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_나는 오늘도 세상으로 출근했습니다.
( 글. 오현미 독립큐레이터 / 작성 : 2019년 )
홍시야는 자유분방한 꿈과 상상을 통해 현실 너머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단지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는 개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궁금했던 것은 어린이처럼 천진하고 예쁜 그림에 사람들이 공명하는 지점이 어디일까였다. 단지 예뻐서일까? 쉽고 친밀하게 느껴져서일까?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초기 그림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의미심장한 분기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었던 이전 그림과 다르게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 내면과 꿈의 세계를 탐닉하고 그 안에만 머물기를 그만두었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홍시야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현재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나아간 듯 보였다. 작가에게 닥친 힘든 시간을 치유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한 그림이 ‘이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를 위한 집을 지어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닿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홍시야가 그린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나와 세상과 연결하고 모두의 안녕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음을 또렷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작가의 성장 경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연작이다. 이전까지 단편적 이미지로 머물던 그림 세계가 여러 가지 다른 존재들이 들어와 관계가 시작되는 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집은 안전한 곳으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무거운 근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어서 집에 머무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된다. 작가 개인에게 안전한 쉼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에 집을 그리며 그러한 집을 자신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인식이 공동체로 확장된다. 이때까지는 아직 관계 맺기를 통해 사회와 잇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지만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감각적 깨달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듯이 그림을 그린다는 분명한 의도로 표현되었다.
홍시야는 2015년 꿈에서 만난 뱀 섬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제주로 들어온다. 제주에서 홍시야는 명상을 하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흰 종이 위에 풀어놓아 마음껏 뛰어놀게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 다작을 하는 작가에 속하지만 홍시야는 그림을 그리기 전, 제주의 자연을 아주 자세히, 되도록 깊이, 작은 미물의 소우주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를 수행한다. 홍시야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각기 다른 제주의 오름이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봉긋 봉긋 올라와 있다. 얼굴과 표정을 가진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다. 물도 표정을 가지고 있고, 나무도 작가가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웃고 있고, 풀도 표정이 있고, 집도 얼굴이 있다. 홍시야 그림 속에 사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나무와 집과 해와 달, 풀과 꽃, 사람, 새, 물고기, 바람과 오름, 물속의 해초들과 배가 걸림 없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작가의 인식 세계가 확장되었음은 제주에서 그린 ‘바라보다’ 시리즈로 증명된다.
비자림로를 따라 빽빽하게 늘어선 삼나무가 도로 확장을 핑계로 잘려 나갈 때, 홍시야는 나무가 사라진 곳에 그림으로 나무를 다시 심었다. 잘린 나무의 고통에 반응하고, 그 영혼을 다시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메신저가 되어 100일 동안 나무 심기를 수행했다. 나무의 고통이 나무만의 고통이 아니라 지구별에 사는 모두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말한다.
홍시야 그림은 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요소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였다. 중력이 있는 듯 없는 듯 이미지들은 유영하듯 부유하기도 하고 자기 자리에 확고하게 머물기도 한다. 힘이 빠진 선은 우주 어딘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듯 자동기술적 방식으로 형상이 된 듯하다.
좋아하는 티티 크레파스로 그린 가냘픈 선은 소리치지 않고 악쓰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말한다. 홍시야가 ‘같이 살자’고 말하는 방식은 생명의 원리가 원래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세련된 화법이다. 오히려 작가 그림 속에 살고 있는 비합리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모여 분명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전달된다. 이 역설 속에 홍시야의 특이성이 있고,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공명함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그림 속에서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가냘픈 선이 종종 등장한다. 이 선들을 볼 때마다 홍시야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느껴진다. 나는 너에게 닿아 있다는 아주 작은 위로의 메시지. ‘나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평론_나는 오늘도 세상으로 출근했습니다.
( 글. 오현미 독립큐레이터 / 작성 : 2019년 )
홍시야는 자유분방한 꿈과 상상을 통해 현실 너머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단지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는 개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궁금했던 것은 어린이처럼 천진하고 예쁜 그림에 사람들이 공명하는 지점이 어디일까였다. 단지 예뻐서일까? 쉽고 친밀하게 느껴져서일까?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초기 그림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의미심장한 분기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었던 이전 그림과 다르게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 내면과 꿈의 세계를 탐닉하고 그 안에만 머물기를 그만두었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홍시야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현재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나아간 듯 보였다. 작가에게 닥친 힘든 시간을 치유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한 그림이 ‘이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를 위한 집을 지어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닿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홍시야가 그린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나와 세상과 연결하고 모두의 안녕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음을 또렷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작가의 성장 경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연작이다. 이전까지 단편적 이미지로 머물던 그림 세계가 여러 가지 다른 존재들이 들어와 관계가 시작되는 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집은 안전한 곳으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무거운 근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어서 집에 머무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된다. 작가 개인에게 안전한 쉼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에 집을 그리며 그러한 집을 자신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인식이 공동체로 확장된다. 이때까지는 아직 관계 맺기를 통해 사회와 잇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지만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감각적 깨달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듯이 그림을 그린다는 분명한 의도로 표현되었다.
홍시야는 2015년 꿈에서 만난 뱀 섬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제주로 들어온다. 제주에서 홍시야는 명상을 하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흰 종이 위에 풀어놓아 마음껏 뛰어놀게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 다작을 하는 작가에 속하지만 홍시야는 그림을 그리기 전, 제주의 자연을 아주 자세히, 되도록 깊이, 작은 미물의 소우주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를 수행한다. 홍시야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각기 다른 제주의 오름이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봉긋 봉긋 올라와 있다. 얼굴과 표정을 가진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다. 물도 표정을 가지고 있고, 나무도 작가가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웃고 있고, 풀도 표정이 있고, 집도 얼굴이 있다. 홍시야 그림 속에 사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나무와 집과 해와 달, 풀과 꽃, 사람, 새, 물고기, 바람과 오름, 물속의 해초들과 배가 걸림 없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작가의 인식 세계가 확장되었음은 제주에서 그린 ‘바라보다’ 시리즈로 증명된다.
비자림로를 따라 빽빽하게 늘어선 삼나무가 도로 확장을 핑계로 잘려 나갈 때, 홍시야는 나무가 사라진 곳에 그림으로 나무를 다시 심었다. 잘린 나무의 고통에 반응하고, 그 영혼을 다시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메신저가 되어 100일 동안 나무 심기를 수행했다. 나무의 고통이 나무만의 고통이 아니라 지구별에 사는 모두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말한다.
홍시야 그림은 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요소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였다. 중력이 있는 듯 없는 듯 이미지들은 유영하듯 부유하기도 하고 자기 자리에 확고하게 머물기도 한다. 힘이 빠진 선은 우주 어딘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듯 자동기술적 방식으로 형상이 된 듯하다.
좋아하는 티티 크레파스로 그린 가냘픈 선은 소리치지 않고 악쓰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말한다. 홍시야가 ‘같이 살자’고 말하는 방식은 생명의 원리가 원래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세련된 화법이다. 오히려 작가 그림 속에 살고 있는 비합리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모여 분명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전달된다. 이 역설 속에 홍시야의 특이성이 있고,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공명함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그림 속에서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가냘픈 선이 종종 등장한다. 이 선들을 볼 때마다 홍시야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느껴진다. 나는 너에게 닿아 있다는 아주 작은 위로의 메시지. ‘나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