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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하는 리듬

( 글. 김연주_문화공간 양 기획자 / 작성 : 2026년 )


홍시야가 100개의 집(2014)에서 시작해 100그루의 나무(2019, 2024)와 100개의 바다(2025)를 지나 다다른 곳은 자연의 근원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자연의 근원은 작품 제목이 알려주듯 나무, 불, 지구, 돌, 물이다. 이를 작가는 “다섯 개의 리듬”이라고 부른다. 이는 동양의 오행(五行)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오행인 목, 화, 토, 금, 수는 이 순서에 따라 도움을 주어 생명을 생성케 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쇠를,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키운다. 작가도 자신만의 오행인 나무, 불, 지구, 돌, 물을 인간과 연결된 자연이자 “자라고, 타오르고, 머물고, 맺히고, 다시 흐르는” 움직임으로 보았다. 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은 멈춤이 없기에 리듬을 만든다. 작가는 이 리듬을 시각 이미지로 바꿔 화폭에 옮겼다.


화폭 위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자유롭다. 선은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면서 형상이 되었다가 사라진다. 원색에 가까운 색채는 힘이 넘친다. 얼핏 보면 이와 같은 그림 기법이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자동기술법과 닮았다. 작가는 미리 구상하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의 흐름에 따라 선을 긋고 색을 쌓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그날 꾸었던 꿈을 그리는데 이처럼 꿈을 그린다는 측면에서도 초현실주의와 맥이 닿는다. 특히 2019년《마음 크로키》작업 과정에서 그려진 작품들을 자신의 깊은 무의식까지 추적했다고 작가 자신이 직접 설명했으니 홍시야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처럼 보이는 홍시야의 작품은 어쩌면 초현실주의와 가장 먼 작품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서 붓을 자유롭게 움직였다면, 홍시야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감각에 맡긴 채 선과 색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추적해도 다시 신체의 감각으로 돌아오며, 내면을 살피지만, 그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자연을 향해 감각을 확장한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내면”에서 나와서 자연의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작업은 창작의 개념이 아니다. 작가의 표현을 빌려오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흐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공존과 공명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았던 작가는 비자림로의 베어진 나무와 바닷속 하얗게 변해가는 산호에 공명했고,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날마다 실천했다. 100일 동안 매일 한 장씩 그림으로 나무를 심어 비자림로의 베어진 나무를 위로했고, 매일 한 장씩 100그루의 나무 초상화를 그려 나무를 기억했고, 하얗게 죽어가는 산호를 위해 "되살림의 믿음"으로 매일 한 장씩 100장의 바다를 그렸다. 작가에게 100이라는 숫자는 의지의 표현처럼 보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수행과 같은 작업 후에 작가는 자연을 더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연에 자신을 맡기고, "자연과 함께 숨을 쉬는 삶"을 산다. 그렇다고 실천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실천의 모습도 자연과 닮아 갔다고 보아야 한다. 자연의 투쟁은 상생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생성의 흐름을 이어가는 강력한 투쟁이다. 그림도 자연의 흐름에 공명하며 자연스럽게 닮아 가서 자연의 이러한 힘이 그림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더 강렬해진 색채, 주저하지 않는 선이 마음을 요동치게도 했다가 고요하게도 만든다. 자연에서 찾은 감각은 어쩌면 더 강렬하고 투쟁적인 것일 수 있겠다.


작가가 자연과 공명하는 과정으로서의 작품은 우리에게도 잊었던 자연의 리듬을 느끼는 감각을 되찾아준다. 그리고 자연의 리듬에 반응하며 자연의 질서를 따라가게 한다. 이렇듯 리듬은 관계에서 나온다. 그래서 홍시야의 작품은 현실 너머를 바라보지 않고 현실 안에 있으며, 관계 안에 있다.







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     

( 글. 최정주_ 전 제주도립미술관장  / 작성 : 2022년  )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안녕을 갈구해왔다. 안락한 생활, 평온한 관계,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염원은 인류가 생존해온 여정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자 최종 정착지의 전형적인 기저가 되어왔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과 마주한 인간들은 어디가 안전한 마지막 정착지인지 도무지 확신하지 못했다. 만족인가 하면 다시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 탓에, 인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끊임없이 질주하며, 울타리를 찾고 경계를 넓히고 더 많이 소유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안녕과 희망이 자라는 거기’를 찾아 막연히 표류하기를 자처해왔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표류의 본능은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두 바퀴의 자전거가 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적 별천지를 향해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는 사이 인간들의 꿈과 상상, 바램이 솜사탕 퍼지듯 무한히 조미되면서, 정착지에 대한 기대는 저 멀리 신기루처럼, 혹은 전설 속 풍문처럼 떠돌며 반복적으로 현실의 비루함을 들춰냈다. 


  동양에서는 다행히도 기원전 8세기경부터 자연을 본받는 것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삼았던 노장사상(老莊思想) 덕분에 인간의 오만을 통찰하고 무위무욕(無爲無慾)의 관계론을 일찌감치 체득해왔지만, 서양의 경우는 인본주의에 따른 독선과 거침없는 방랑의 역사 속에서 최근까지도 더 나은 세상을 찾는 일에 열의를 보여 왔다. 문학에서만 보아도 그 숱한 예증들이 발견된다. 1516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공상소설을 출판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최대한 구체화하려는 시도를 펼친 바 있다. 여행자 라파엘이 보았다는 이상국 ‘유토피아’ 섬은 법률, 제도, 풍습에 대한 영국의 현실을 조율한 그야말로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전해주었지만, 그 실체는 제목 그대로 세상 속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사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툭하면 모반죄에 걸려 27년이나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아직 이 지상에 존재한 적은 없지만, 철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완벽한 국가”를 찾겠다는 일념을 앞세워 1620년 경, 『태양의 나라(La città del Sole)』를 출간하여, 공평무사한 이상사회의 존재를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 사력을 다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26년에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를 통해 물질적인 풍요를 이상향으로 제시하는가 하면, 아일랜드의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소인국과 거인국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이상 국가를 소개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반성까지 덧붙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문학의 맥을 잇기도 했다. 


  이처럼 평안한 이상향을 좇았던 인간의 의지는 줄기차게 문명과 역사를 일구며 괄목할만한 창조적 행보를 쌓아나갔고, 그 결과 인간의 삶의 구조와 객관적 환경은 눈부시게 진화되어왔다. 생명을 이루는 조건들이 공학적 연구를 통해 낱낱이 밝혀졌고, 물질의 성질과 현상도 물리학적 접근에 의해 조밀한 법칙들까지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인간은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듯한 문명적 도구들을 차고 넘치게 생산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의 번영을 위한 규칙과 결속을 만들고, 공동체 바깥과의 유연한 사회적 관계망을 다지며 풍요로운 생활 패턴 속에서 그 나름대로 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자문할 지점에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세상을 터덜터덜 유랑하는 그대와 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곳에서 진정 안녕한 것인가?”

 


  ○ 당신의 유토피아에 초대합니다. (Here is the invitation for your Utopia)


  홍시야가 그리는 풍경은 태초의 유토피아와 닮아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가 8세기에 제시한 서사시, 『변신 이야기(Metamorphōseōn librī)』에서 전하는 인류의 황금시대는 태초의 사회라고 언급한다. 그곳은 어떠한 법도 권력도 처벌도 위협도 없는 안전지대이며, 저마다 올바른 일을 하고 평온한 시간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민족들이 사는 곳이고, 일 년 사계절 내내 자연 속에서 나는 풍요로운 꿀과 열매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설에 가깝지만, 인류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유토피아’가 사실은 스스로 떠나온 출발 지점에 있었음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홍시야가 다루는 세상은 둥글고, 조화롭고, 경계가 없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와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평화로운 친밀감을 유지한다. 그곳은 드넓은 들판이기도 하고, 해저와 하늘과 우주이기도 하고, 그 모든 곳이 자유롭게 부유하는 다차원의 공간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안에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하고, 산과 바다, 집, 길, 해와 달, 수풀과 동물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어느 틈엔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은 저마다의 자율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공을 느릿느릿 떠다닐 때도 있고, 지상 위에 차분히 내려 앉아 안전한 울타리 속의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우주 기지처럼 사방에 퍼져 또 다른 존재들과 마주하며 교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림 속 사물들은 납작하게 눕기도 하고,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고, 빙글빙글 회전도 하고, 어깨춤을 추듯 리듬을 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이곳에서는 갓 태어난 존재와 농축된 세월을 품은 존재가 격의 없이 서로 느긋한 호흡을 나누고, 작은 씨앗과 열매의 순환도 평화롭게 교차된다. 

  또한 이곳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맑고 청아한 색채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찬란한 빛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말하자면 캔버스 속의 모든 생명들과 존재들은 평화롭게 공존하고, 서로에게 순응하며 조화를 이루고, 건강한 생명의 기운을 나누고 있다. 그야말로 이곳은 모두가 안녕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홍시야의 그림 속 세상은 작가가 명상을 통해 만나는 무의식 속의 풍경이다. 작가는 20년 가까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치유와 성찰을 지시하는 음악과 미술로 평온한 그곳 세상의 이야기와 풍정을 표현해왔다. 그녀의 그림이 조용조용 말을 걸어오고, 기도처럼 맑고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와 같은 심상의 고요와 평화의 기원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시야는 평온이 가득한 무의식 속의 세계가 전해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이곳 세상에 옮겨 놓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왔다. 그림 수행은 작가 스스로를 위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 되도록 차분히 그 통로를 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방은 결국 인간이 지향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정착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방랑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횡행한 바이러스의 침탈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덮친 위기와 상실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 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무의식에 몰입한 매순간마다 화두를 풀기 위해 몸소 그곳 세상을 깊이 체험하고 답을 찾는 여정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다툼보다는 평화가, 독단보다는 공론이, 죽음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시되었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삶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풍요롭다는 것을 매일 보고 느껴온 작가는 스스로 이 귀중한 전언을 그림으로 배달하는 전달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모두의 안식을 위한 집을 계속 그렸고, 생명의 소중함을 기리기 위해 자연을 쉼 없이 묘사하면서 점점 지금과 같은 공존의 풍경을 확대해 나갔다. 


 그렇다면 작가가 보는 그곳 세상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류가 기억하고 남기고자 한 화합과 평화의 순간들이 조각조각 저장되어 있는 의식의 창고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하는 그림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이유는, 어느 세대이고 방랑자로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원초적 생명과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진정한 가치들을 깊이 깨닫고 이를 의식의 창고에 넣어두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과정이 수 만년의 층위로 두텁게 겹을 이룬 까닭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림의 화평한 세상 속에서 정작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그 가치를 외면하거나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삶의 대부분을 욕망의 늪 속에서 떠돌며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림 속 평화의 땅에서 유유자적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자연인 것이다.       


  홍시야가 그림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다차원의 시공간에 서려있는 평화와 공존의 모습을 불러오는 의도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안녕과 희망이 자라나는 유토피아’가 신기루처럼 저 멀리에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 안의 각성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뜻한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홍시야의 그림은 이제라도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서로에게, 또한 자연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위무를 나누도록 다정히 권유하는 듯하다. 이러한 권유에 귀 기울이며 작가의 작품과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림 속 유토피아에 어서 빨리 초대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작은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 wish you ar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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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야 회화전

나무, 마음에서 마음으로
2024. 5. 10. ~ 6. 30

글. 박은희 (비아아트 대동호텔 아트센터 대표)



비자림로 확장 공사로 베어진 나무의 밑동을 바라보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작업실 근처 비자림로를 지날 때마다 화가 홍시야는 나무에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누군가는 나무와 숲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100일 동안 100그루의 나무를 그리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첫 100그루의 나무 그림으로 『나무 마음 나무』 책이 2023년 출간되었다. 계속해서 작가는 나무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이어갔다. 인간의 얼굴 초상을 그리듯 나무의 초상화를 그린다. 식물 세밀화나 삽화가 아니라 나무의 태도와 마음, 나무의 에너지와 기운을 담은 그림 100점을 다시 그렸다.

비아아트 전시장 한 벽면에 100개의 나무 초상화가 가득히 숲을 이룬다. 숲을 이룬 나무 그림 하나하나를 보면 춤추듯, 노래하듯, 힘들지만 인내하는 얼굴, 가지가 잘렸지만 새순을 피우는 나무, 서로 기대어 어루만지는 나무가 보인다. 그림으로 그려진 반려 식물을 누군가에게 입양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나무에 물어봐, 숲에 물어봐”라고 100개의 나무 초상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전하고 있다. ‘홀로 뿌리내리고 가지 뻗고 잎사귀 떨구는 나무’ ‘알아볼 자 없다고 약해지거나 티 내지 않은 채 안으로 속살을 키워내는 나무’가 여기에 있다.

나무 자체에 대한 전시를 궁리하면서 홍시야의 나무 그림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생명의 순환, 공존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밝고 유쾌하게 그린 그림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무에서 뻗어 나온 작고 동글동글한 동그라미들은 나무가 소곤소곤 불러주는 노래 같기도 하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면서 그려진 나무 그림, 숲 그림이 전하는 아름다움과 위로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자연을 이루는 씨앗인 나무에 겸손하게 다가가 보기를 소망한다.







나는 오늘도 세상으로 출근했습니다.

 ( 글. 오현미_독립큐레이터 / 작성 : 2019년 )

 


  홍시야는 자유분방한 꿈과 상상을 통해 현실 너머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단지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는 개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궁금했던 것은 어린이처럼 천진하고 예쁜 그림에 사람들이 공명하는 지점이 어디일까였다. 단지 예뻐서일까? 쉽고 친밀하게 느껴져서일까?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초기 그림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의미심장한 분기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었던 이전 그림과 다르게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 내면과 꿈의 세계를 탐닉하고 그 안에만 머물기를 그만두었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홍시야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현재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나아간 듯 보였다. 작가에게 닥친 힘든 시간을 치유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한 그림이 ‘이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를 위한 집을 지어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닿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홍시야가 그린 ‘그곳에 집을 짓다’ 시리즈는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나와 세상과 연결하고 모두의 안녕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음을 또렷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작가의 성장 경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연작이다. 이전까지 단편적 이미지로 머물던 그림 세계가 여러 가지 다른 존재들이 들어와 관계가 시작되는 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집은 안전한 곳으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무거운 근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어서 집에 머무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된다. 작가 개인에게 안전한 쉼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에 집을 그리며 그러한 집을 자신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인식이 공동체로 확장된다. 이때까지는 아직 관계 맺기를 통해 사회와 잇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지만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감각적 깨달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듯이 그림을 그린다는 분명한 의도로 표현되었다.


 홍시야는 2015년 꿈에서 만난 뱀 섬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제주로 들어온다. 제주에서 홍시야는 명상을 하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흰 종이 위에 풀어놓아 마음껏 뛰어놀게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 다작을 하는 작가에 속하지만 홍시야는 그림을 그리기 전, 제주의 자연을 아주 자세히, 되도록 깊이, 작은 미물의 소우주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를 수행한다. 홍시야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각기 다른 제주의 오름이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봉긋 봉긋 올라와 있다. 얼굴과 표정을 가진 존재는 사람만이 아니다. 물도 표정을 가지고 있고, 나무도 작가가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웃고 있고, 풀도 표정이 있고, 집도 얼굴이 있다. 홍시야 그림 속에 사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나무와 집과 해와 달, 풀과 꽃, 사람, 새, 물고기, 바람과 오름, 물속의 해초들과 배가 걸림 없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작가의 인식 세계가 확장되었음은 제주에서 그린 ‘바라보다’ 시리즈로 증명된다.

 비자림로를 따라 빽빽하게 늘어선 삼나무가 도로 확장을 핑계로 잘려 나갈 때, 홍시야는 나무가 사라진 곳에 그림으로 나무를 다시 심었다. 잘린 나무의 고통에 반응하고, 그 영혼을 다시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메신저가 되어 100일 동안 나무 심기를 수행했다. 나무의 고통이 나무만의 고통이 아니라 지구별에 사는 모두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말한다.


 홍시야 그림은 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요소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였다. 중력이 있는 듯 없는 듯 이미지들은 유영하듯 부유하기도 하고 자기 자리에 확고하게 머물기도 한다. 힘이 빠진 선은 우주 어딘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듯 자동기술적 방식으로 형상이 된 듯하다.


 좋아하는 티티 크레파스로 그린 가냘픈 선은 소리치지 않고 악쓰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말한다. 홍시야가 ‘같이 살자’고 말하는 방식은 생명의 원리가 원래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세련된 화법이다. 오히려 작가 그림 속에 살고 있는 비합리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모여 분명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전달된다. 이 역설 속에 홍시야의 특이성이 있고,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공명함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그림 속에서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가냘픈 선이 종종 등장한다. 이 선들을 볼 때마다 홍시야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느껴진다. 나는 너에게 닿아 있다는 아주 작은 위로의 메시지. ‘나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나는 자연과의 연결을 중심으로 공존이라는 주제를 갖고 작업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마치 마법의 장소에 연결되는 것 같다. 의식이 확장되고, 많은 생명체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감각들을 통해 나는 자연스럽게 신화적인 세계로 들어가 일상 너머 원형의 이미지들을 만난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내 안에 남은 인상들을 다양한 도구로 기록하는 모든 행위가 나의 예술이다. 나의 작업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본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달아 주고 싶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모두 서로 연결된 하나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작업의 의도고 목표다. 그림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나무 마음 나무_홍시야 지음』013. 문 중에서 -





홍시야의 마음크로키
내 깊은 무의식까지 추적해 머릿속, 마음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나에게 그림은 내밀한 내면의 관찰이자 오늘 하루의 탐구이고, 기록이다. 오늘도 나는 내면의 공간을 열어 둔 채 이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몸과 마음 사이 어딘가에 나의 감각이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한 내림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이 작업 과정을 《마음 크로키》라고 명명하였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탐구하며 기록된 작업물이라 할 수 있겠다.





2026_《다섯 개의 리듬, 숨으로》 
다섯 가지 리듬 (목.화.토.금.수)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라고 느낀다. 다섯 가지 리듬을  그린다는 것은 자연과 나,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흐름을 하나의 감각으로 묶어내는 작업이다.나는 오랫동안 자연과 인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몸과 영혼 사이의 연결을 작업으로 탐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이미 그 흐름 안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그것을 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섯 개의 리듬》 은 그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깨우기 위한 시도다. 자라고, 타오르고, 머물고, 맺히고, 다시 흐르는 이 다섯 가지의 움직임은 자연의 질서이자 인간의 몸과 감정, 그리고 의식 깊은 곳의 흐름과도 닮아 있다. 나는 이 순환을 설명하거나 해석하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가 직접 느끼고 그 감각을 따라간다. 이 작업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선은 생각보다 먼저 흘러나오고, 색은 감정의 결을 따라 쌓인다. 그렇게 화면 위에는 의미 이전의 감각, 언어가 닿기 전의 상태들이 조용히 머문다.


내 작업의 중심에는 늘 ‘공존’과 ‘공명’이 있다. 자연과 인간, 비인간 존재 물질과 비물질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흐른다고 느낀다. 나는 그 사이의 미세한 떨림과 울림을 포착하고 싶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 고정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는 동안 흩어져 있던 감각들은 하나로 모여든다. 과도하게 타오르던 것은 잦아들고, 멈추어 있던 것은 다시 흐른다. 균형을 잃었던 마음은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간다. 이때의 변화는 의도된 결과라기보다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길 때 일어나는 회복에 가깝다. 나에게 예술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흐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표현은 앞에 나서지 않고, 감각은 조용히 스며든다. 그렇게 작업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다섯 개의 리듬》은 시대의 빠른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 다시 느끼고, 다시 연결되고, 다시 흐르기 위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이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배워간다.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흐름을 따라 조용히 선을 긋고, 색을 쌓는다. 이 작업은 결국 자연과 함께 숨 쉬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2025_《100개의 바다, 100개의 마음》

이 프로젝트는 사라져가는 바다 숲에 작은 희망을 심는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기후 위기로 바다 생태계가 무너지고, 눈부시던 산호와 해조류 숲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이 슬픔과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방식으로 바다에 마음을 건네보자고요. 그렇게 《100개의 바다, 100개의 마음》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한 장씩 100일 동안 바다를 그리고, 바다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붓을 들고, 물감으로 바다의 표정과 숨결, 기억을 담아내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림 한 장 한 장은 바다를 향한 나의 작은 기도였고, 그 조각들이 모여 언젠가 다시 살아날 바다 숲의 단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작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되살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사라져가는 바다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 작은 시선과 손길이 모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완성된 100장의 그림은 하나의 바다 숲처럼 펼쳐졌습니다. 그 안에는 평온함도 있고, 거칠고 혼란스러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모든 순간을 품은 바다는 여전히 살아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0개의 바다, 100개의 마음》이 당신에게도 잠시 바다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는 바다에게, 작은 마음 하나가 닿기를.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여, 또 다른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홍시야의 사운드 드로잉 
숨 가쁜 일상 속에서 완전히 긴장을 풀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래서 ‘이완’은 현대 사회 중요한 이슈가 된 것 같다. 진정으로 이완하면 우리 안에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고 한다.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그런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나는 《사운드 드로잉》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시각 그림이라면, 주로 싱잉볼 연주를 통해 전달하는 《사운드 드로잉》은 청각 그림, 나아가 진동을 통해 온몸으로 감각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소리 그림을 그리길 잘했구나’ 특별한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난 지 어느덧 3년. 경직된 마음으로 공간에 들어왔던 이들의 얼굴이 환히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평화로움을 선물하는 이 작업에 큰 의미를 느낀다. -『나무 마음 나무_홍시야 지음』081.소리로 그린 그림 중에서 -






2019_제주,바라보다
산으로 숲으로 오름으로 또 바닷속으로 들어가며 제주를 만났고,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어떤 의도나 계획 없이 마음속의 느낌과 감정의 이미지를 더듬어가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 안에서 만났던 시간들을 모아 봅니다. 특별하고도 소중했던 그림들을 만나는 동안 마음 깊이 있었던 이야기도 함께 전해 봅니다. 아름다운 우리들의 제주 섬이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삶의 터전이 되기를 바란다고요. 이 지구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제주, 나아가 지구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길로 들어와 함께 걸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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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ART GALLERY 인터뷰 中_ 작가노트


나 홍시야는 늘 희망을 품은 채 그림을 그리는 드로잉 작가다.  어떤 희망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따뜻한 햇살도 들어오고 신선한 공기도 솔솔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창을 내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어린 시절부터 현실보다 훨씬 더 생생했던 꿈의 세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컸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누워 잠을 자며 현실과 꿈속을 오 고 가는 이중생활을 시작했으며, 여태 현실과 꿈의 경계를 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고질병을 가지 고있다. 또한 나는 끈기가 없고 변덕이심해서 학교제도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회에 떠밀려 나오긴 했으나 내가 좋아하는 일, 흥미가 있는 일에는 미친 듯이 파고드는 성격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림과 만난 이 후 그림에 온 마음을 뺏긴 채 현재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의 방식을 통해 작업 방 식과 스타일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는데, 사물, 사람, 풍경과 만난 시점의 감각, 느낌, 정서, 잔상 등 마음속 움직임을 포착한 후 이미지들을 마치 뜰채로 걷어 올리듯 그대로 쓱쓱 드로잉으로 옮겨내는 작업 방식에 2015년 ‘마음 크로키’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나는 오늘도 도화지 앞에 앉아 무의식(상상) 속에서 온갖 진귀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림들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리듬을 만들 고 더듬더듬 화음을 찾아내면서 얻는 싱싱하고 생생하고 뜨거운 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제주로 이주한후 새로운 프로젝트와 전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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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A 2020년 2월호 인터뷰_자기만의 속도로 살아요
( 글. 서울경제신문 문화부. 조상인 기자 / 작성 : 2020년 )


누구나 각자의 속도가 있다.
비행기와 자동차, 돛단배, 자전거가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듯.
동백과 목련,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을 틔우듯.
덩치 큰 고래가 꼭 빠른 것만은 아니요.
줄돔이나 가물치라고 늘 쫓겨 다니는 것은 아니다.
공존이 소중한 까닭은 속도가 다른 것들이 한데
모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각양각색의 동식물이 물빛, 풀빛 수채물감 속에 살아 숨 쉬는
홍시야의 그림이 참신한 선물로 보이는 이유다.



홍시야의 그림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난 꿈 같은 장면들이지만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이뤄야 할 이상향을 제시한다.
“각자 제 속도가 있고 고유의 빛이 있어요.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며, 어떻게 나만의 빛깔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하길 바라요.
저는 돌, 풀, 나무, 물 어디서든 얼굴이 보여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소중한 생명을 서로 귀히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그림들이랍니다.







전시 서문_지금, 여기 하모니

( 글. 기당 미술관 고준휘 학예사 / 작성 2020년 )


홍시야 작가는 형상(形像)의 승부사이다. 조금 과감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은 결국 선(線)의 드로잉(Drawing)이다. 크레파스와 연필, 볼펜으로 이루어진 드로잉은 형상의 신경과 뼈대를 이루고, 추상적 채색은 거기에 살과 피부를 덧입힌다. 그녀가 제주라는 지역에 당도하기 전까지 작품들을 많이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것은 어쩌면 다분히 인간으로서 느끼는 존재론적 주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공존과 평화, 순응과 조화를 이야기한다. 결코 그것을 나이브(naive)한 로맨티시즘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작품 속 형상들을 꿈틀대고 살아 숨쉬며, 독창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마음 한 편을 아프게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아니 어쩌면 과거에도 절대 도달한 적이 없을 것 같은 이상적 불안과 행복을 회상하듯 ( - 전시 서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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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_자연을 담은 마음 크로키 

( 글. 소설가 김재영 / 작성 2019년 )


홍시야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다.

저 동글동글한 말소리를 들어보라.

오름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종알종알 댄다.

나무는 키 작은 야생초에게 소곤소곤 속삭인다.

고래는 눈짓만으로도 멀리 떨어진 연인에게

사랑의 말을 전한다.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라.

감귤나무 꽃의 하얗고 향기로운 옹알이를,

섬휘파람새의 흥겨운 노래를.

포옹 포옹 솟는 물방울과

콜콜 잠자는 달님과 메롱 하는  해님을.

말풍선을 입에 물고 날아가던 도요새가 

고망난 돌 위에 앉아 풀어놓는 사연을.



들린다, 홍시야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바람이 실어 오는 저 아름다운 생명의 합창

그래서 행복하다. 그래서 소망하게 된다.









제주신문 기획특집 인터뷰_간절한 마음 담은 에너지 공유하고파 
( 글. 임청하 기자 / 작성 : 2020년 9월 22일 )



때로 뭔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생각을 어지럽히는 요인을 잠시 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시야 작가는 스스로의 마음과 무의식에 깊숙이 파고든다. 그렇게 현실과 내면 사이를 넘나들며 비로소 느껴지는 잔상들을 여러 재료 위에 표현한다. 그가 제주에 오게 된 계기는 꿈에서 비롯됐다. 서울에서도 산과 가까운 지역에서 작업하던 그는 어느 날 섬 위에서 밥을 먹는 꿈을 꿨다. 그 섬이 움직이면서 파도가 일렁이는데 바닥을 내려다보니 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주로 가야겠다고 결정했고 입도한 지 대략 5년이 됐다.


그의 작업은 획일화된 장르로 단정짓지 않는다. 직접 이름을 지은 ‘마음 크로키’가 그의 장르다.
대개 움직이는 사물이나 사람을 포착해서 담아내는 게 크로키라면, 작가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상들의 순간을 붙잡아 드로잉으로 옮기는 방식이다. 얼핏 떠오르는 감정이나 이미지, 생각들조차 수면 위로 끄집어냄에 따라 자기 자신을 조우하는 것이다.

10여 년이 훌쩍 넘게 작업을 이어오면서 알게 된 건 인간과 자연, 모두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모양과 크기, 색깔도 다 다르지만 결국 소중하고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작품 소재 간 따로 경계가 없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그의 작품 안에선 뭐든 될 수 있다.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물고기새’가 등장하기도 한다. 누군가 정해놓은 틀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공존’이 자리한다.

그의 첫 개인전 제목은 ‘한숨의 그릇 담다’로 시작해 두 번째 전시에서는 ‘숲의 한숨 듣다’로 이어졌다. 매일 몸이 숨을 쉬고 비우는 것에서 나아가 그에게 늘 위로를 주는 숲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서였다.


범상치 않은 꿈으로부터 시작한 제주살이는 오히려 마음을 열게 되는 시간들로 꾸며지고 있었다. 작가가 늘 가까이 두려는 자연과 벗삼는 일상이 지속되서인지 시선이 유연해졌다.그동안 정형화돼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미술교육을 해보기 시작했고 일반인을 위한 드로잉 수업도 진행하게 됐다. 그저 경험을 나누는 것뿐인데 일상에 환기가 된다는 이들을 보면서 깨달은 게 많아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라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제주에서 하게 되면서 생각이 넓어진 거 같다”며 제주자연과 섬이라는 환경이 주는 영향들로 인해 나눔의 개념이 확장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나눌 수 있는 작가가 되고싶다고 덧붙였다.

난개발이 만연한 제주의 현재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하루 한 장씩 꼬박 100일간 나무를 그렸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매일 기도한 게 모아지면 에너지가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마음을 공유하고 싶다”며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힘을 내야한다고 했다.

좀처럼 미래를 알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서로가 아끼며 살다보면 모호한 여정에서도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해진 건 없지만 자신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인생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